모든 이야기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

by DaOk 2024. 11. 17.

기원전 209년, 진나라의 폭정이 극에 달하던 시기,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황제 호해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민중의 불만은 날로 커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진승오광은 국경 수비를 위해 징발된 농민병 900명을 이끌고 어양으로 향하던 중 큰 비로 인해 기한 내 도착이 불가능해지자, 그 자리에서 반란을 결심합니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반란

봉기의 시작

두 사람은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유명한 구호를 외치며 농민들을 설득했습니다. 진나라의 억압적인 법 아래에서는 어차피 사형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자신들의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초나라 멸망 후에도 남아 있던 반진 세력을 규합하여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웠고, 진승은 스스로 왕에 올랐습니다.

전개와 결과

진승과 오광의 반란군은 빠르게 여러 성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반란군 내부의 분열과 조직력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진나라의 반격과 부하의 배신으로 진승은 사망하고,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나라의 지배에 심각한 균열을 초래했고, 이후 항우와 유방 같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으로, 민중의 힘이 국가 체제에 도전한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이들의 반란은 진나라 멸망의 서막이 되었으며, 이후 중국 역사에서 민중이 주도한 여러 반란의 전범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댓글